■ 작업노트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from heaviness to lightness"
나는 오랫동안 '형태가 사라지는 순간'이라는 지점에 주목해왔다. 완전함을 지향하며 이상화된 형상들이
무너지고 흩어지는 찰나를 포착하면서, 물질이 변화하는 그 미묘한 과정 속에서 존재의 본질로 다가가는
순간을 기록하고자 했다.
작품의 중심 대상은 전통적이고 권위적인 조각상과 고전적인 미의 상징들이다. 육체적 완전성, 이상화된
여성상, 지식과 권력의 상징인 석고상을 해체했다. 폭발과 붕괴의 찰나는 사진 속에서 영원히 정지된 채,
대상의 원형은 서서히 희미해진다.
그러나 이 해체 과정은 단순히 파괴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익숙한 믿음과 전통적 가치로부터 거리를 두
고, 그 간극에서 새로운 미적 감각과 의미를 창조하는 시도이다. 형상의 균열과 파편은 그 자체로 또 다른
구조적 가능성을 제시하며, 낯설지만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형태가 사라지는 순간, 존재의 본질
은 오히려 더 선명하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작업에서 등장하는 하늘, 흙, 물, 돌 등과 같은 자연의 요소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해체된 형상들이
되돌아가는 근원의 자리이자, 모든 생명이 순환하는 무대다. 조형물이 파편이 되어 흩어지는 순간, 그것이
다시 자연으로 스며드는 과정 속에서 나는 '사라짐'이 단절이 아니라 귀환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나는 우리가 짊어진 무게들 육체와 감정 _ , 기억과 전통, 책임과 상처에 주목한다. 단단하고 완벽해 보이는
형상들이 결국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통해, 해체와 비움이 불러오는 해방과 자유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견고한 표면 아래 숨겨진 균열과 불완전함은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작품의 배경으로 설정된 공간은 내 개인의 기억과 조상의 역사, 그리고 가족과 전통이 중첩된 장소이다.
그 위에서 형태가 소멸되는 과정은 과거로부터의 해방이자, 다시 시작하기 위한 침묵의 움직임이다. 사라
짐은 끝이 아니라 변형이며, 무너짐은 새로운 의미를 위한 여백이다.
존재는 사라짐 속에서 더 또렷해진다.
그리고 결국, 존재하는 것은 다 사라진다.
■ 작업노트
"Vanish and exist"
최근 경제 불황, 우크라이나 전쟁 등 인간이 자초한 위기 외에도 튀르키에 지진으로 5만 명도 넘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기술이 발전하고 우주여행을 이야기하는 이 시점에 대자연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생각해본다. 그 무수한 죽음, 그리고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마음마저
먹먹하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성경 전도서 1장 2절에는 '바니타스 바니타툼 옴니아 바니타스(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s)라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뜻의 구절이 있다. 이처럼 바니타스(vanitas)는
라틴어로 허무나 덧없음을 뜻하는데, 이를 주제로 17세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많이 그려졌다. 종교전쟁과
흑사병 등 비극적인 경험과 더불어 금욕을 대표하는 칼뱅 사상의 영향으로 화가들로 하여금 세상의
부귀와 명예를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시류가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삶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해골, 촛불, 꽃 등을 그리는 것이 특징인데 여기서 해골은 죽음의 필연성을, 썩은
과일은 재물의 덧없음을, 촛불이나 시계는 인생의 짧음을, 꽃은 인생의 덧없음을 의미한다. 나는
폭발이라는 행위를 통해 현대적 기술로 재창조된 바니타스를 사진과 영상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번 작업에서는 바니타스 정물과 현대 미술작품들을 오마쥬한 오브제들이 등장하고, 몇 만분의 1초로
오브제들이 폭발하면서 무규정한 다양성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또한 사람의 눈으로 인지
불가능한 속도로 폭발하는 오브제들이 롤링셔터 (전지셔터의 센서가 위에서 아래로 순차적으로 스캔되어
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 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보여 지고 있다. 유리나 플라스틱이 휘어지거나 예상
못한 형태로 늘어나기도 하였다. 실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이미지들을 엄청난 속도로 폭발하는 오브제와
롤링셔터에 의해 재현되어졌다.
정물 혹은 현대미술작품 그리고 기술이 가지고 있는 오류, 거기에 폭발이 만들어내는 연출된 우연을 통해
파괴되는 아찔한 순간을 촬영하였으며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결혼제도의 문제점은 드레스에 부케를
폭발시켜보았고, 물질 만능주의를 깨지는 항아리나 재물을 상징하는 과일의 폭발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였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죽음 앞에 겸허하자는 바니타스적 메시지와 함께 폭발을 통한 끝이자
시작에 대한 이야기이다.
현재의 우리는 당연한 것들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아가곤 한다. 익숙한 것들은 그것들이 너무 익숙해서
인지하지 못할 때가 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부재가 존재를 대신한다고 말했다. 이는
소중한 것이 사라졌을 때 그 소중함을 깨달을 , 때가 있다. 가까울 때는 몰랐다가 멀어지고 나면 빈자리를
느끼는 것과 같다. 나는 폭발로 사라지는 이미지를 통해 오히려 존재를 강조하고 싶고, 그 찰나의 모습을
통해 존재의 소중함을, 불쾌한 아름다움을 향유하려는 의도이다.‘사라짐’으로 ‘소중함’을, ‘파괴’를 통해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라지고 존재한다.
이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