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글
픽셀의 봄꿈[1]
박은혜
1.황규태의 사진은 간명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복합적이다.표면은 장난스럽고 경쾌하지만,그 너머에는 진지한 사유-“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어느 범위를 넘으면 사진이 아니라고 할까. 사진은 사진이어야만 되는 것일까.” 황규태, 이영준, 『황규태 Hwang Gyu-Tae』, 열화당, 2005, p. 18.-를 기반한, 한창 바쁘고 소란스럽게 작동하는 실험실 하나가 있다.
황규태는 동세대의 사진가들과 달리 사진 매체의 기계적,기술적 속성에 관심을 갖고 현대적으로 실험하며 ‘새로운 사진’을 보여주어 왔다.타인이 촬영한 사진 차용,이미지 합성,필름 버닝,확대,공간연출,최근 NFT아트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론으로 사진 속 피사체를 낯설게 보여주고, 이전에 없었던 ‘새로움’으로 나아가고 있다.그의 사진에서 피사체가 표상하는 것 혹은 그것에 잠재된 것을 기호학적/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은 무용해 보인다.우리가 사진에 대해 알고 있던 것들 혹은 은연중 기대했던 것들,그러니깐 사진을 둘러싼 엄숙한 것들을 디딤돌 삼아 공기 중으로 점프할 때 비로소 황규태의 사진/이미지를 유희할 수 있을 것이다.
2. 황규태는 우연히 픽셀(pixel)을 발견했다.텔레비전 브라운관의 표면을 확대경으로 바라보면서.이후 디지털 이미지의 표면을 구성하는 픽셀을 컴퓨터 화면에서 선택했다.픽셀의 존재나 그것의 발견과 선택이 이공계열에선 놀라울 것 없겠지만이는 존재하지만 육안으로 볼 수 없었던 것들 볼 수 있게 하는 일,다시 말해 ‘새로운 시각성’을 실험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대부분 작품 제목은 ‘픽셀’로 형식과 내용이 일치되어 왔지만 종종 형상(figure)을 먼저 연상시키며 재현과 추상 사이를 오갔다.또한 사후 미술가 말레비치의이름을 덧붙이며 이미지의 절대성을 현대적-디지털적으로 재해석을 시도했다. 이처럼 황규태는 픽셀들을 재료 삼아 자의적으로 구성하며 픽셀 작업을 확장해가고 있다.
3. 짝사랑이라는 단어는 남몰래 누군가를 애틋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과 행동을 떠올리게 한다.하지만황규태는 순수한 애정에서부터 불안한 욕망에 이르는 무엇들로 “짝사랑”을상정한다.이는 가장 통속적인 인간사 일부를 세상만사 희로애락으로 펼쳐보는 셈이다.물론 작가는 철학적 고투보다는 시각적 유희에 보다 더 수긍할 것이다.
지난 픽셀 작업들이 직선과 사각으로 이뤄진 비교적 단순한 수열의 형태에 가까웠다면,이번 새로운 픽셀 작업은 구불구불한 곡선들,일렁이는 복잡한 형태들이 돋보인다.이는 그동안 픽셀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가시화하고 이해하는 것에서 픽셀의 세계에 적극 개입해 작가의 감성을 표현하는 것으로의 이행으로 보인다.유연하지만 변덕스러운 이미지,독립적이지만 한편으로 기울고 어긋난 이미지.이는 다시금 “짝사랑”의 상념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우리는 모두 “짝사랑”을 경험했다.지금 우리는 그 시절의 유치함,씁쓸함, 찬란함을 회상한다. 돌이켜 생각하면 짝사랑의 시작은 그 대상을 그저 한없이 바라보았던 순간이 아니었을까.보다 낭만적으로 표현한다면,짝사랑의 대상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그저 배경으로 흐릿해진다. 짝사랑은 언제나 괴롭고 숱한 번뇌의 시간을 견뎌야만 하지만,짝사랑의 대상을 눈에 담을 수 있음에 만족하고 마냥 기뻐하기도 했다.이처럼 황규태의“짝사랑”도 ‘표면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제안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무심히 바라보며,그것에 깊이 빠져들어 장난스럽게 유희하길 말이다.
갓 태어난 신생아의 시력은 대략 0.03 정도라고 한다.빛과 어둠,사물의 유무 정도를 구분하는데,점차 원근의 초점을 맞추기 시작해 흑백에 이어 색채를 인식하는 순서로 시각이 발달한다. 100일 무렵 색채를 인지하게 되면서 아기는요란하게 움직이는 컬러 모빌을 따라 바삐 시선을 옮기며 방긋 웃는다.단순한 색과 형태의 모빌의 움직임은 어른의 시각에선 지루할지 몰라도,아기에겐 세상에 그것만큼 즐겁고 중요한 것은 없어 보인다.사실 이처럼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시기는 일생에 견주면 아주 잠깐이고,심지어 어른이 된 지금 그렇게 즐거웠던 기억은 어렴풋하다.알록달록한 색채들,구불구불한 곡선들,일렁이는 복잡한 형태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어린 아기의 근원적인 시각에서 황규태의 이번 “짝사랑”을 탐험해보면 어떨까.철학적 설명에 동의하기 보다는 마음 내키는 대로 솔직하게 탐미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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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봄꿈의 사전적 정의는 1.봄날에나른해져 깜빡 잠든 사이에 꾸는 꿈. 2.달콤하고 행복한 것을 그려 보는 꿈. 3.한때의 덧없는 일이나 헛된 공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2] 황규태의 픽셀 작업은 서구 미술사와 교묘하게 얽혀 보다 흥미로운 분석이 가능하다:1920년대 현실을 넘어서고자 했던 초현실주의나 절대성을 열망했던 절대주의, 1960년대 대중문화와 공모하며 동시에 그것을 비판하고자 했던 팝 아트,그리고 이에 대응했던 옵 아트 등.하지만 이 글은 ‘표면을 바라보는 즐거움’에 더욱 집중할 것이다.





